복지뉴스 신발 모형을 조각하는 목형사
- 날짜
- 2010-05-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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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노라면 언젠가는 좋은 날도 오겠지. 흐린 날도 날이 새면 해가 뜨지 않더냐.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밑천인데 쩨쩨하게 굴지 말고 가슴을 쫙 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내일은 해가 뜬다’는 노래 가사인데 1966년에 김문응 작사, 길옥윤 작곡으로 쟈니리가 부른 대중가요이다.
그런데 1967년에 ‘사노라면 언젠가는 좋은날도 오겠지’라는 노래가사가 ‘현실 부정적’이라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다가 1980년대에 들어서 「사노라면」이라는 제목으로 여러 가수가 불러 널리 알려졌는데 당시에는 작자 미상으로 알려졌었다. 사노라면 언젠가는 좋은 날도 온다. 그러나 그 좋은 날이 오기까지 사람들은 춥고 어두운 곳에서 웅크리게 마련이다. 영원히 해가 뜨지 않을 것처럼.
유재동씨 ⓒ이복남
에이블포토로 보기▲유재동씨 ⓒ이복남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누구나 나름대로의 인생을 산다. 태어나서 죽는 것은 누구나 똑같이 겪어야 하지만 생(生)과 사(死) 사이의 기간 동안은 모든 사람이 제각각 천차만별로 살아간다. 나만의 인생길에서 간혹 ‘아, 저 사람도 나처럼 살았구나!’ 싶을 만치 비슷한 행로를 지나 온 사람도 만날 것이고 간혹은 ‘어쩜, 세상에 이런 인생도 있을까?’ 싶어 보는 이 까지도 목이 메게 하는 삶을 살아 온 사람도 만날 것이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인생살이 속에서도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유재동씨의 어린 날도 정말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을 만큼 별나고 특이한 일들이 많았지만 불행히도 그는 말을 할 수 없고 들을 수도 없는 청각장애인이다. 같은 청각장애인들과 수어로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가 자신의 느낌을 제대로 말을 하지 않으니 유재동씨의 어린 시절은 수어통역사를 통해 들은 바로 그저 짐작이나 할 뿐이다.
유재동(49)씨는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여배리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는데 그는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유복자이다. 어머니 허남순((72)씨는 18살 때 동네 어른들의 중매로 남편 유병길을 만나 결혼을 했고 젊은 부부는 홀로 된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마을에서 농사를 지었다.
부산농아학교 중등부졸업 ⓒ이복남
에이블포토로 보기▲부산농아학교 중등부졸업 ⓒ이복남
젊은 부부인데도 웬일인지 아이가 없었으나 아이 가질 새도 없이 밭 갈고 씨 뿌리는 농사일에 더 매달려야 했다. 결혼한 지 5년인가 지나서 색시가 첫 애를 가졌다. 그러나 아이를 가진 기쁨도 잠시 남편에게 영장이 나왔다. 그러나 남편은 일자무식이고 나이도 많아 군대가 면제라고 알고 있었는데 영장이라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6.25무렵에 면사무소가 불에 타서 호적을 새로 정리했다고 듣기는 했지만 영장이라니 앞이 캄캄했지만 누구의 부름인데 감히 거역할 수 있었겠는가.
색시도 첩첩산골에서 가난하게 자라 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한 까막눈이라 한글도 모르지만 남편도 없는 집에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부른 배를 안고 밭일 논일을 가리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은 일을 하다가도 먼 하늘을 쳐다보며 남편이 무사히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기를 빌었다.
색시의 배는 점점 불러오고 산달이 되어 오늘내일 하고 있는데 부고 한 장이 날아들었다. 남편의 사망 통지서였다. 색시는 하늘이 아뜩하여 남산만한 배를 안고 기절을 했고 그래서 정신도 없는 가운데서 아들을 출산했다. 남편의 죽음은 이유도 잘 모른 채 우야무야 끝이 나고 말았는데 산모에게는 죽은 남편 보다는 산아들이 더 소중해서 남편의 죽은 이유야 어찌됐든 산 사람은 살아야 했던 것이다. 아이는 아버지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 채 똘똘하고 야무지게 잘 자랐다.
어느 바닷가에서 ⓒ이복남
에이블포토로 보기▲어느 바닷가에서 ⓒ이복남
그러나 어머니는 아직 20대로 젊은 나이인데 왜 재혼을 하지 않았을까. 아들은 어머니가 왜 재혼을 하지 않았는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머니 허남순 여사의 대답은 아이가 장애만 아니었어도 재혼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아부지 부고 받고 정신도 없는 가운데 다음날 아를 안 낳았능교?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할낀게, 시어마시하고 아 키우고 농사 짓니라 눈코 뜰새없이 바빠서 재혼 같은 거는 생각도 몬했고...”
그런데 아이가 돌 무렵 홍역을 했다. 홍역이 무섭기는 했지만 누구나 한번은 치르는 일이라 온 정성을 다하여 아이의 열이 내리기를 빌었다. 그러나 아이의 열은 쉽사리 내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날마다 열이 절절 끊는 아이를 안고 같이 울었고 아침이면 아이를 업고 신반리에 있는 병원을 찾았다. 그래도 아이의 열이 내리지 않자 시어머니는 남편도 없고 아들도 없는 손자가 어찌 될까봐서 무당을 찾아 다녔다. 할머니는 날마다 쌀 한 되로 백찜(백설기떡)을 쪄서 마당에 상을 차려 놓고 “지발 우리 손주 좀 살리 주이소” 하늘에 대고 손을 비비며 빌고 또 빌었다.
유재동씨 이야기는 2편에 계속.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1-07-06 13:19)
그런데 1967년에 ‘사노라면 언젠가는 좋은날도 오겠지’라는 노래가사가 ‘현실 부정적’이라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다가 1980년대에 들어서 「사노라면」이라는 제목으로 여러 가수가 불러 널리 알려졌는데 당시에는 작자 미상으로 알려졌었다. 사노라면 언젠가는 좋은 날도 온다. 그러나 그 좋은 날이 오기까지 사람들은 춥고 어두운 곳에서 웅크리게 마련이다. 영원히 해가 뜨지 않을 것처럼.
유재동씨 ⓒ이복남
에이블포토로 보기▲유재동씨 ⓒ이복남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누구나 나름대로의 인생을 산다. 태어나서 죽는 것은 누구나 똑같이 겪어야 하지만 생(生)과 사(死) 사이의 기간 동안은 모든 사람이 제각각 천차만별로 살아간다. 나만의 인생길에서 간혹 ‘아, 저 사람도 나처럼 살았구나!’ 싶을 만치 비슷한 행로를 지나 온 사람도 만날 것이고 간혹은 ‘어쩜, 세상에 이런 인생도 있을까?’ 싶어 보는 이 까지도 목이 메게 하는 삶을 살아 온 사람도 만날 것이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인생살이 속에서도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유재동씨의 어린 날도 정말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을 만큼 별나고 특이한 일들이 많았지만 불행히도 그는 말을 할 수 없고 들을 수도 없는 청각장애인이다. 같은 청각장애인들과 수어로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가 자신의 느낌을 제대로 말을 하지 않으니 유재동씨의 어린 시절은 수어통역사를 통해 들은 바로 그저 짐작이나 할 뿐이다.
유재동(49)씨는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여배리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는데 그는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유복자이다. 어머니 허남순((72)씨는 18살 때 동네 어른들의 중매로 남편 유병길을 만나 결혼을 했고 젊은 부부는 홀로 된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마을에서 농사를 지었다.
부산농아학교 중등부졸업 ⓒ이복남
에이블포토로 보기▲부산농아학교 중등부졸업 ⓒ이복남
젊은 부부인데도 웬일인지 아이가 없었으나 아이 가질 새도 없이 밭 갈고 씨 뿌리는 농사일에 더 매달려야 했다. 결혼한 지 5년인가 지나서 색시가 첫 애를 가졌다. 그러나 아이를 가진 기쁨도 잠시 남편에게 영장이 나왔다. 그러나 남편은 일자무식이고 나이도 많아 군대가 면제라고 알고 있었는데 영장이라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6.25무렵에 면사무소가 불에 타서 호적을 새로 정리했다고 듣기는 했지만 영장이라니 앞이 캄캄했지만 누구의 부름인데 감히 거역할 수 있었겠는가.
색시도 첩첩산골에서 가난하게 자라 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한 까막눈이라 한글도 모르지만 남편도 없는 집에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부른 배를 안고 밭일 논일을 가리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은 일을 하다가도 먼 하늘을 쳐다보며 남편이 무사히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기를 빌었다.
색시의 배는 점점 불러오고 산달이 되어 오늘내일 하고 있는데 부고 한 장이 날아들었다. 남편의 사망 통지서였다. 색시는 하늘이 아뜩하여 남산만한 배를 안고 기절을 했고 그래서 정신도 없는 가운데서 아들을 출산했다. 남편의 죽음은 이유도 잘 모른 채 우야무야 끝이 나고 말았는데 산모에게는 죽은 남편 보다는 산아들이 더 소중해서 남편의 죽은 이유야 어찌됐든 산 사람은 살아야 했던 것이다. 아이는 아버지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 채 똘똘하고 야무지게 잘 자랐다.
어느 바닷가에서 ⓒ이복남
에이블포토로 보기▲어느 바닷가에서 ⓒ이복남
그러나 어머니는 아직 20대로 젊은 나이인데 왜 재혼을 하지 않았을까. 아들은 어머니가 왜 재혼을 하지 않았는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머니 허남순 여사의 대답은 아이가 장애만 아니었어도 재혼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아부지 부고 받고 정신도 없는 가운데 다음날 아를 안 낳았능교?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할낀게, 시어마시하고 아 키우고 농사 짓니라 눈코 뜰새없이 바빠서 재혼 같은 거는 생각도 몬했고...”
그런데 아이가 돌 무렵 홍역을 했다. 홍역이 무섭기는 했지만 누구나 한번은 치르는 일이라 온 정성을 다하여 아이의 열이 내리기를 빌었다. 그러나 아이의 열은 쉽사리 내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날마다 열이 절절 끊는 아이를 안고 같이 울었고 아침이면 아이를 업고 신반리에 있는 병원을 찾았다. 그래도 아이의 열이 내리지 않자 시어머니는 남편도 없고 아들도 없는 손자가 어찌 될까봐서 무당을 찾아 다녔다. 할머니는 날마다 쌀 한 되로 백찜(백설기떡)을 쪄서 마당에 상을 차려 놓고 “지발 우리 손주 좀 살리 주이소” 하늘에 대고 손을 비비며 빌고 또 빌었다.
유재동씨 이야기는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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