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뉴스 시어머니는 굿을 하고 며느리는 병원가고
- 날짜
- 2010-05-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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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면 이웃집 아낙들이 “저 집 아 죽었는가?” 자기네들끼리 쑤군거렸고 어쩌다가 길에서 색시를 만나면 “아는 아즉 살아 있겄제?” 라며 어린 아이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며느리는 아이를 업고 병원을 드나들었고, 시어머니는 굿도 하고 한 달 가까이 백찜을 쪄서 치성을 드렸다. 아이의 열은 내렸으나 아이가 말을 채 배우기도 전이라 결국은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청각언어장애인이 되고 말았다.
창신정밀 유재동씨 작업장. ⓒ이복남
에이블포토로 보기▲창신정밀 유재동씨 작업장. ⓒ이복남
“듣지도 몬하고 말도 몬하는 아픈 아를 데불고 무신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재혼임니꺼. 내 팔자가 그러니께 죽으나 사나 내가 끼고 살아야지예. 우짜던동 아들 공부시킬라꼬 죽을 둥 살 둥 일만 했심니더.”
시간은 흐르고 아이는 자라서 입학통지서가 나왔는데 다른 아이들을 따라 가지 못할까봐 한해 쯤 늦게 보내려고 입학을 시키지 않았다. 그런데 듣지 못하고 말하지도 못했지만 아이는 똘똘하고 영리해서 모든 것은 눈치로 알아챘다. 아이는 어른들이 자신을 입학시키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눈치로 알아채고 할머니와 어머니가 밭에 간 사이에 학교 앞 문방구에서 이름표와 손수건을 사서 달고 혼자서 의령 동림국민학교에 입학을 했다.
초등학교에 입학은 했지만 교사가 특별히 청각장애인을 배려하는 수업은 아니었으므로 교과진도를 따라가지 못했고 성적은 늘 뒤에서 세는 게 더 빨랐다. 그냥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갔다 왔다 하는 것뿐이었다. 단 하나 붓글씨는 잘 썼다. 붓글씨 시간에는 선생의 설명이 없어도 수업이 가능했던 것이다.
제주도 신혼여행. ⓒ이복남
에이블포토로 보기▲제주도 신혼여행. ⓒ이복남
마산에 고모가 살고 있었는데 친정에 들린 고모는 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해도 공부를 못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아이를 데려갔다. 고모는 조카를 마산 농아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는 초등학교 6년을 졸업했지만 농아학교 1학년에 새로 입학을 했다. 농아학교에서는 선배들에게 수화도 배웠고 공부도 곧잘 따라했다. 그리고 붓글씨 즉 서예에서는 두각을 나타냈다. 이미 초등학교를 마치고 온 터라 농아학교에서는 1학년 3학년 6학년으로 월반을 시켜 주었다.
서예 선생은 그의 글씨에 감탄을 하면서 밤늦도록 그를 지도했고 전국 서예대회에 데리고 나가 수상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시어머니와 촌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어쩌다 한 번씩 보는 아들의 모습은 벼루에 먹 갈아서 습자지에 붓으로 글씨를 쓰는 게 다였다. 마산농아학교를 졸업하고 부산농아학교 중학부에 시험을 쳤다.
“맨날 먹 갈고 얍실한 조이에 글 쓰는 것 뿌이 안하는 것 같아서 시험에 떨어질까봐 억수로 걱정했심더.”
다행히 아들은 부산 맹아학교 농아부에 붙었다. 할머니는 촌에서 홀로 농사를 짓고 어머니는 아들과 함께 부산으로 이사를 했다. 아들은 학교를 다니고 어머니는 고무공장에 다녔다. 유재동씨는 농아학교를 부산 중앙동에 다녔다고 하는데 이해할 수가 없어 필자가 인터넷을 뒤졌더니 그때 농아학교는 분명 중앙동에 있었다.
유재동씨 가족. ⓒ이복남
에이블포토로 보기▲유재동씨 가족. ⓒ이복남
6.25 이후 1953년에 서울맹아학교 부산분교로 서구 남부민동 산35번지에 부산맹아(盲啞)학교가 설립되어 맹인과 농아를 가르쳤다. 1974년 부산맹학교와 부산농아학교로 분리가 되었고 1977년 2월에 부산농아학교는 중앙동 구 대창초등학교로 이사를 했는데 유재동씨는 그 무렵 중앙동 부산농아학교에 입학을 했던 모양이다. 그의 중학부 졸업과 함께 중앙동 시대는 끝이 나고 고등부는 신축 이전한 망미동 부산배화학교를 다녔던 것이다.
아들이 고등학생이 되자 어머니는 고무공장을 그만두고 주방 아줌마를 구하는 식당을 찾았는데 주인은 어머니의 신체가 너무 왜소하다고 퇴자를 놓기도 했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내 키가 157이라고 했는데, 키는 잘 모리겠고 몸무게는 그때나 지금이나 46키로(kg)임니더."
아무튼 아들 하나만은 잘 키워야겠기에 어머니는 식당에서도 악착같이 일을 했는데 아들이 돈을 벌 생각은 하지 않고 엉뚱하게도 서예를 하겠다고 떼를 썼다.
“안 된다. 이눔아 내가 니를 우찌 키웠는데 니가 돈도 안 되는 붓글씨를 할라카노!”
어머니는 한사코 아들을 말렸고 아들은 하는 수없이 서예가의 꿈을 접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제화기술을 배웠다. 그 무렵 어머니는 다니던 식당을 그만두고 서면에서 김밥 떡볶이 등을 파는 포장마차 장사를 했다.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1-07-06 13:19)
며느리는 아이를 업고 병원을 드나들었고, 시어머니는 굿도 하고 한 달 가까이 백찜을 쪄서 치성을 드렸다. 아이의 열은 내렸으나 아이가 말을 채 배우기도 전이라 결국은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청각언어장애인이 되고 말았다.
창신정밀 유재동씨 작업장. ⓒ이복남
에이블포토로 보기▲창신정밀 유재동씨 작업장. ⓒ이복남
“듣지도 몬하고 말도 몬하는 아픈 아를 데불고 무신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재혼임니꺼. 내 팔자가 그러니께 죽으나 사나 내가 끼고 살아야지예. 우짜던동 아들 공부시킬라꼬 죽을 둥 살 둥 일만 했심니더.”
시간은 흐르고 아이는 자라서 입학통지서가 나왔는데 다른 아이들을 따라 가지 못할까봐 한해 쯤 늦게 보내려고 입학을 시키지 않았다. 그런데 듣지 못하고 말하지도 못했지만 아이는 똘똘하고 영리해서 모든 것은 눈치로 알아챘다. 아이는 어른들이 자신을 입학시키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눈치로 알아채고 할머니와 어머니가 밭에 간 사이에 학교 앞 문방구에서 이름표와 손수건을 사서 달고 혼자서 의령 동림국민학교에 입학을 했다.
초등학교에 입학은 했지만 교사가 특별히 청각장애인을 배려하는 수업은 아니었으므로 교과진도를 따라가지 못했고 성적은 늘 뒤에서 세는 게 더 빨랐다. 그냥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갔다 왔다 하는 것뿐이었다. 단 하나 붓글씨는 잘 썼다. 붓글씨 시간에는 선생의 설명이 없어도 수업이 가능했던 것이다.
제주도 신혼여행. ⓒ이복남
에이블포토로 보기▲제주도 신혼여행. ⓒ이복남
마산에 고모가 살고 있었는데 친정에 들린 고모는 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해도 공부를 못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아이를 데려갔다. 고모는 조카를 마산 농아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는 초등학교 6년을 졸업했지만 농아학교 1학년에 새로 입학을 했다. 농아학교에서는 선배들에게 수화도 배웠고 공부도 곧잘 따라했다. 그리고 붓글씨 즉 서예에서는 두각을 나타냈다. 이미 초등학교를 마치고 온 터라 농아학교에서는 1학년 3학년 6학년으로 월반을 시켜 주었다.
서예 선생은 그의 글씨에 감탄을 하면서 밤늦도록 그를 지도했고 전국 서예대회에 데리고 나가 수상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시어머니와 촌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어쩌다 한 번씩 보는 아들의 모습은 벼루에 먹 갈아서 습자지에 붓으로 글씨를 쓰는 게 다였다. 마산농아학교를 졸업하고 부산농아학교 중학부에 시험을 쳤다.
“맨날 먹 갈고 얍실한 조이에 글 쓰는 것 뿌이 안하는 것 같아서 시험에 떨어질까봐 억수로 걱정했심더.”
다행히 아들은 부산 맹아학교 농아부에 붙었다. 할머니는 촌에서 홀로 농사를 짓고 어머니는 아들과 함께 부산으로 이사를 했다. 아들은 학교를 다니고 어머니는 고무공장에 다녔다. 유재동씨는 농아학교를 부산 중앙동에 다녔다고 하는데 이해할 수가 없어 필자가 인터넷을 뒤졌더니 그때 농아학교는 분명 중앙동에 있었다.
유재동씨 가족. ⓒ이복남
에이블포토로 보기▲유재동씨 가족. ⓒ이복남
6.25 이후 1953년에 서울맹아학교 부산분교로 서구 남부민동 산35번지에 부산맹아(盲啞)학교가 설립되어 맹인과 농아를 가르쳤다. 1974년 부산맹학교와 부산농아학교로 분리가 되었고 1977년 2월에 부산농아학교는 중앙동 구 대창초등학교로 이사를 했는데 유재동씨는 그 무렵 중앙동 부산농아학교에 입학을 했던 모양이다. 그의 중학부 졸업과 함께 중앙동 시대는 끝이 나고 고등부는 신축 이전한 망미동 부산배화학교를 다녔던 것이다.
아들이 고등학생이 되자 어머니는 고무공장을 그만두고 주방 아줌마를 구하는 식당을 찾았는데 주인은 어머니의 신체가 너무 왜소하다고 퇴자를 놓기도 했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내 키가 157이라고 했는데, 키는 잘 모리겠고 몸무게는 그때나 지금이나 46키로(kg)임니더."
아무튼 아들 하나만은 잘 키워야겠기에 어머니는 식당에서도 악착같이 일을 했는데 아들이 돈을 벌 생각은 하지 않고 엉뚱하게도 서예를 하겠다고 떼를 썼다.
“안 된다. 이눔아 내가 니를 우찌 키웠는데 니가 돈도 안 되는 붓글씨를 할라카노!”
어머니는 한사코 아들을 말렸고 아들은 하는 수없이 서예가의 꿈을 접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제화기술을 배웠다. 그 무렵 어머니는 다니던 식당을 그만두고 서면에서 김밥 떡볶이 등을 파는 포장마차 장사를 했다.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1-07-06 13:19)